고즈넉한 기타카마쿠라에서 시작된 하루
원래 계획대로라면 가마쿠라는 어제 방문했어야 했지만, 예상치 못한 숙취로 인해 하루를 미뤄야 했다. 하지만 여행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법이고, 그런 돌발 상황조차도 여행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어쩌면 하루 늦게 가게 되면서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안고, 다시 한번 신중하게 동선을 계획한 후 기타카마쿠라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가마쿠라역이나 후지사와역에서 출발하지만, 나는 기타카마쿠라역에서 시작하는 동선을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기타카마쿠라역은 가마쿠라의 주요 번화가에서 조금 벗어나 있어 상대적으로 한적하고, 일본 특유의 조용한 분위기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었다. 게다가 기타카마쿠라에서 가마쿠라까지 이어지는 길목에는 수많은 사찰과 역사적인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어, 도보로 이동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장소를 둘러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전철을 타고 약 1시간을 달려 기타카마쿠라역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관광지라기보다는 한적한 시골 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겼고, 붐비는 도시와는 달리 평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작은 역사를 중심으로 조용한 거리와 낮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느긋하게 걸어가는 주민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첫 일정은 엔가쿠지(円覚寺) 방문이었다. 사찰 개장과 동시에 입장할 계획이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주변을 먼저 둘러보기로 했다. 마을을 걷다 보니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과 출퇴근하는 주민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현지인의 일상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순간들은 언제나 흥미롭다. 길을 따라 조용히 걸으며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하루를 시작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꽤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고 싶었지만, 워낙 이른 시간이어서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열지 않았다. 몇몇 작은 카페가 보였지만, 간단한 음료 정도만 판매하고 있었기에 제대로 된 식사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배가 조금 고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점심때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로 마음먹고, 개장 시간이 되자마자 엔가쿠지로 향했다.
가마쿠라의 고즈넉한 사찰, 엔가쿠지와 겐초지
엔가쿠지는 가마쿠라를 대표하는 선종 사찰 중 하나로, 1282년 호조 도키무네가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것을 기념하여 세운 곳이라고 한다. 가마쿠라 지역에는 사찰이 많지만, 엔가쿠지는 특히 가을 단풍 명소로 유명하다. 하지만 내가 방문한 시기는 겨울이라 화려한 단풍은 기대할 수 없었고, 대신 차분한 겨울 풍경이 나름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일본의 사찰들은 대체로 경내가 넓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설계된 경우가 많다. 엔가쿠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사찰 내부를 걷다 보면 곳곳에서 석상과 문화재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건물 하나하나가 오랜 역사를 품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입장할 수 있는 구역이 생각보다 적었다. 일반 관광객의 출입을 제한하는 구역이 너무 많아, 절반 이상이 차단되어 있어 충분히 둘러볼 수 없었다는 점이 다소 아쉬웠다.
엔가쿠지에서의 짧은 탐방을 마친 후, 다음 목적지인 **겐초지(建長寺)**로 이동했다. 겐초지는 가마쿠라에서 가장 중요한 사찰 중 하나로, 가마쿠라 오산(五山) 중 으뜸으로 꼽힌다. 엔가쿠지보다도 더 크고, 보다 전통적인 선불교식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웅장한 **산문(三門)**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목재 기둥으로 이루어진 입구는 사찰의 규모를 한눈에 보여주는 듯했다. 내부로 들어서니, 사찰 중심부에는 불전과 함께 조용한 정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엔가쿠지와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상대적으로 겐초지는 더 자연과 밀접하게 어우러진 느낌이었다.
사찰을 둘러보며 경내 끝자락으로 이동하자, 전망대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전망대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간이 아니었다. 그냥 산 정상의 높은 지점일 뿐이었고, 특별히 다듬어진 공간이 아니었기에 전망을 즐기기에는 다소 불편했다. 오히려 올라오는 길이 너무 힘들었던 탓에 후회가 될 정도였다. 하지만 후지산이 멀리 보이는 광경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가마쿠라의 중심, 쓰루가오카 하치만궁
힘들게 전망대를 내려와 다음 일정으로 향한 곳은 **쓰루가오카 하치만궁(鶴岡八幡宮)**이었다.
이곳은 가마쿠라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신사로, 가마쿠라 막부의 수호신을 모신 유서 깊은 장소이다. 신궁의 역사는 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하치만을 모시며 세운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가마쿠라 막부의 중심이 되었던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이다. 지금도 지역 주민들은 물론이고 일본 전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위해 찾는 가마쿠라의 대표적인 명소 중 하나다.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웅장한 구조물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특히 입구에서 본전까지 이어지는 긴 계단은 하치만궁의 상징적인 요소 중 하나로, 올라가면서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들과 작은 부적 판매소도 자리하고 있어, 참배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입구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신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요소들이 더욱 돋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사케 다루(酒樽)**들이 줄지어 쌓여 있는 모습이었다. 일본 전통 신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이 사케 다루들은 각 지역의 양조장에서 기부한 것들로, 신에게 봉헌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흰색 바탕에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적힌 글씨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운 좋게도 이곳을 방문한 날, 신관들과 무녀들이 전통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일본 신사에서는 특정한 날에만 볼 수 있는 장면이라, 예상치 못한 경험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정갈한 흰색과 붉은색 의상을 입은 무녀들이 신사 안을 정리하고 신관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는 신앙의 공간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곳은 다른 사찰이나 신사보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분위기라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경내를 탐방할 수 있었다. 특히 연못과 작은 다리들이 신사와 어우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고, 계절마다 다른 분위기를 선사할 것 같았다. 가을 단풍이 끝나가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구역에서는 여전히 붉은 단풍이 남아 있었고, 그 덕분에 예상치 못한 초겨울 단풍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봄에 방문한다면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더욱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할 것 같았다.
천천히 걸으며 붉은 다리와 연못 주변을 따라 거닐었다. 사람들이 많았지만, 의외로 붐빈다는 느낌보다는 활기차고 생동감 있는 분위기가 더 강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방문객들이 있었고, 신사를 찾은 참배객들과 관광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각자의 방식으로 이 공간을 즐기고 있었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궁에서의 시간을 충분히 즐긴 후, 슬슬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아침을 건너뛴 채 사찰을 걸으며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기 때문인지 허기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가마쿠라에는 맛집이 많기로 유명하니, 어디로 갈지 신중하게 고민하며 신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을 해결한 후, 다음 일정으로 가마쿠라의 또 다른 명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가마쿠라 탐방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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